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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증후군과 마녀사냥의 심리에 대하여

by koochin 2022.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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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햄릿 증후군(Hamlet Syndrome)

사람의 스타일을 크게 둘로 나눈다면 햄릿형과 돈키호테형이 있습니다. 햄릿은 이럴까 저럴까 생각이 너무 많아서 행동이 일어나지 않고 돈키호테는 생각도 하기 전에 행동부터 하는 스타일입니다. 셰익스피어 희곡 햄릿에서 햄릿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햄릿의 아버지 엘시노어 국왕이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자 삼촌인 클로디어스가 왕위에 오릅니다. 그리고 곧 어머니 거트루드는 새로운 왕과 재혼합니다. 시동생과 결혼을 한 것입니다. 햄릿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집니다. 아버지의 죽음이 삼촌과 어머니가 공모한 범죄로 보이지만 물증이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왕인 아버지가 꿈에 나타나 자신을 죽인 클로디어스에게 복수해달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집니다. 기구한 운명의 햄릿은 내적인 갈등을 이렇게 독백으로 풀고 있습니다. “기구한 운명의 화살을 맞고도 죽은 듯 참아야 하는가? 아니면 성난 파도처럼 밀려드는 재앙과 싸워야 하는가? 죽는 건 그저 잠자는 것일 뿐 잠들면 마음의 고통과 육신에 따라붙는 무수한 고통은 사라지는가? 죽음이야말로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결말이 아닌가? 그저 칼 한 자루면 모든 것을 깨끗이 끝낼 수 있는데 그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 남아 현재의 고통을 참고 견디는 것입니다. 결국 분별심은 우리를 겁쟁이로 만드는구나.” 이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방황하는 현상을 심리학 용어로 햄릿 증후군 혹은 결정장애라고 부릅니다. 햄릿 증후군의 원인으로는 개인적인 측면과 사회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부모에게 의존하는 수동적인 환경에서 성장한 사람일수록 결정을 내리기 어려워하는 성격이 될 수 있습니다. 대학 졸업 후에도 부모에게 의지하는 부분 정치에 대한 냉소 등이 그것입니다. 온라인 기술의 발달도 햄릿 증후군의 확산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인터넷으로 대상에 대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게 되면서 오히려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소비자가 늘었기 때문입니다. 대량 생산으로 인해 소비자의 선택 가능성이 넓어진 것도 소비자의 햄릿 증후군과 연관이 있습니다. 정해진 비용 내에서 기회비용을 줄이기 위해 고민하다 보면 선택이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는 부모의 과도한 간섭이 오히려 결정장애 세대를 만든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초등학생처럼 부모의 간섭을 받는 대학생이 많습니다. 대학 상담소에는 부모가 너무 간섭해 힘들다는 대학생들의 고민이 쏟아집니다. 대학생이 된 자녀 주의를 헬리콥터처럼 빙빙 돌면서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는 헬리콥터 부모들이 자녀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는 것입니다.

 

2. 마녀사냥의 심리

마녀사냥은 주로 16세기에서 17세기 중세에 이루어졌습니다. 15세기부터 산발적으로 이루어지다가 16세기 말경에 절정을 이루어졌습니다. 서양의 중세는 이교도와의 전쟁 종교 개혁 그리고 마녀사냥으로 점철되었습니다. 마녀는 당시의 개념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악마와 계약을 맺어 마력으로 하늘을 날아다니며 악마와 교접하는 자로 규정되었습니다. 이들을 무차별 잡아들여 화형에 처하는 것이 마녀 사냥이었습니다. 기독교 교의학에 의하면 마녀는 단순히 평범한 이단자들이 아닙니다. 가톨릭 신앙을 모독하면서 악마에게 충성하는 배교자들입니다. 마녀사냥의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깔려 있습니다. 당시 유럽은 가톨릭이 주축이 되어 이교도인 이슬람권과 십자군 전쟁을 벌였으나 패하고 종교 개혁으로 비롯된 30년 전쟁에서 가톨릭 세력이 약화하고 개신교 세력이 강해지면서 여러 종파로 갈리었습니다. 여기에 기근과 여러 차례에 걸친 흑사병이 가세했습니다. 이런 사회적인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희생양으로 만들어낸 것이 마녀였습니다. 또 종교개혁 이후 신구 교도들 간 극심한 갈등 속에 서로 상대를 신앙의 적으로 몰아갈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조작된 이미지가 마녀였습니다. 마녀재판은 종파적 갈등에서 반대파를 제거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했습니다. 마녀를 가리는 방법도 아주 간단합니다. 물에 던져서 살아 나오면 마녀이고 죽으면 마녀가 아니라고 인정했습니다. 불 위를 걷게 해서 살아 나오면 마녀고 죽으면 마녀가 아니라고 간주했습니다. 이처럼 마녀로 지목되면 죽음을 면하기 어려웠습니다. 이런 목적 외에도 특정인에 대한 시기나 질투의 수단으로도 이용되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의 100년 전쟁에서 프랑스를 구한 잔 다르크도 마녀로 몰려 열아홉 살의 나이로 화형에 처했습니다. 프랑스의 샤를 7세는 자칫 영국으로 넘어갈 뻔했던 왕위를 잔 다르크 덕분에 되찾았지만 그녀의 인기가 치솟자 심한 질투를 느꼈던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귀족들까지 갑자기 부상한 잔 다르크를 시기하여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녀의 죄명은 누구든 사제를 거치지 않고는 신성한 신의 계시를 받을 수 없다는 규율을 어겼다는 것이었습니다. 후에 잔 다르크는 성녀로 추앙되었습니다. 천문학자 조르다노 브르노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화형을 받았으며 천체의 타원 궤도를 발견한 천문학자 케플러의 어머니 카타리나도 마녀로 몰렸습니다. 병약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카타리나는 어머니 대신 산파 집에서 자라야 했습니다. 
덕분에 약초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어 주술과 약초로 사람들의 질병을 치료해 주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마녀로 몰리는 계기가 되었지만 케플러의 탓도 있었습니다. 지구가 자전한다는 코페르니쿠스의 가설을 케플러의 관측으로 실증적 토대를 마련한 바람에 당시 성직자들에게 미움을 받았던 것입니다. 카타리나는 본인의 논리 정연한 항변과 아들 캐플러의 도움으로 무죄가 되었지만 이미 사망 직전이었습니다. 마녀로 처형된 사람 중에는 여성이 80%에서 90%였습니다. 대개 공동체에서 출산과 질병 치료를 도와주고 점을 치는 무녀들이었습니다. 마녀의 경제적인 측면도 상당했습니다. 명분은 마녀사냥이었지만 이들을 잡아들여 자백받으면 그녀의 재산은 영주 주교 이단 심문관이 나눠 가지도록 했기에 멀쩡한 사람도 마녀로 지목되어 화형을 당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습니다. 약 300년간 유럽 전역에서 지속된 마녀사냥에서 희생된 사람의 수가 수십만에 이른다는 설도 있고 수백만에 이른다는 설도 있습니다. 마녀사냥은 현대에도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1950년대 미국 공화당 상원 의원이었던 매카시는 어느 날 의회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국무성 안에 105명의 공산당원이 있다.” 이 말 한마디가 일파만파로 번져 나중에는 마녀사냥으로 번졌습니다. 아무리 잘나고 똑똑한 사람이라도 여기에 걸리면 빠져나오기 어렵고 설사 빠져나온다고 하더라도 그의 인생은 구겨지고 맙니다. 아인슈타인이 물방울 두 개는 합쳐도 하나라고 기자들에게 농담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언론에서는 아인슈타인의 말이라면서 “일 더하기 일은 일이다.”라고 보도했다. 사실을 조금만 왜곡시켜도 얼마든지 마녀를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지는 마녀사냥은 주로 정치인 유명인사 연예인 등을 대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어느 방송에서 한 여성이 신장 180cm 이하의 남자는 모두 루저다라는 발언했다가 마녀사냥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당사자인 그 여성은 인터넷 악플에 시달리다가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아 병원 치료를 받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만들고 싶은 풍토가 마녀사냥의 온상인 것입니다. 미리 거짓이라고 답을 정해놓고 답을 찾다 음모 이론은 마치 마녀사냥과도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미워하던 사람이 어느 분야에서 크게 성공했다면 아마도 거짓일 거라고 미리 답을 정해 놓고는 조금만 엇비슷한 증거가 나와도 그렇게 몰아붙이기 때문에 음모론은 더욱 증폭됩니다. 심리학적으로 이러한 음모론은 인간에게 두려움을 주지만 때로는 두려움에서 해방해주기도 합니다. 노르웨이와 북유럽 툰드라 지역에는 레밍이라는 들쥐들이 살고 있는데 번식력이 강하다 보니 그 지역에 먹이가 부족해지면 새로운 서식지를 찾아 집단으로 이동한다고 합니다. 앞선 무리가 달리기 시작하면 무리 전체가 그 뒤를 따라 움직이는데 그러다 절벽 호수 바다에 집단으로 빠져 죽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선두를 뒤따르는 집단행동을 레밍 효과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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