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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을 대표하는 사회학자 3인 소개

by koochin 2022.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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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막스 베버(Max Weber)

막스 베버(Max Weber)는 역사파의 한 계열에 속해 있지만 학문적 방법론에서는 리케 르트(Heinrich Rickert)의 영향 아래서 신 칸트파의 입장을 취하였다. 근대 자본주의 특징을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과 관련하여 밝힌 것은 그의 뛰어난 업적으로 보고 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저술 중의 하나는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으로, 그는 종교 사회학에서부터 연구를 시작하였다. 이 책에서 베버는 동방과 서방 문화가 각자 발전하는 방식의 여러 원인 가운데 종교가 하나의 중요한 요소였다고 주장했다. 금욕적 칼뱅주의(Calvinisme)라는 특정한 성격이 서구의 합법적 관료제, 자본주의, 권위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음을 강조한다. 또 그는 자본주의가 마르크스주의적 맥락에서는 순수하게 유물론적이지 않고 소유관계, 지식, 기술의 발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종교적 이상과 통념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여 개신교가 자본주의의 발전에 끼친 영향을 검토하기도 하였다. 그의 학문적 활동은 역사학, 사회학, 경제학, 법학 등 매우 폭이 넓었으며, 근대에 있어 매우 위대한 사회 과학자의 한 사람으로 불리고 있다. 베버의 주요 저서들은 종교 사회학, 정치 체제, 조직 이론, 행위의 합리화를 다루고 있다. 그의 또 다른 주요 저서인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베버는 국가를 일컬어 합법적 폭력을 독점하도록 주장하는 독립체로 규정하였고, 이는 현대 서구 정치 과학 연구의 근간을 이루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베버는 사회와 경제에서 했던 관료제 분석은 현대의 조직 연구에서는 아직도 중심이 되고 있다. 사람들은 그의 유명한 업적을 "베버 명제"라고 칭하기도 한다. 그는 처음으로 사회적 권위에 대한 다양한 측면을 인식하여, 카리스마적 권위, 전통적 권위, 법적 권위로 범주화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관료제를 분석하면서 근대 국가 조직이 합리적으로 권위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기술했다.

 

2. 아루놀트 하우져(Arnold hauser)

아루놀트 하우져(Arnold hauser)는 1892년 5월 8일 헝가리 티미소아라라는 작은 도시 유대인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와 베를린, 비엔나에서 미술사에 관한 공부를 하였고 헝가리 부다페스트대학교에서 미술사로 강단에 서기도 하였다. 부다페스트에서는 발라츠, 루카치, 만하임 등과 함께 '일요서클'이라는 지식인들의 모임을 형성하였는데 하우져의 예술사 연구에서 사회학적 연구 방법과 영화와 극예술에 대한 연구 등이 모두 이 일요서클을 통해서 얻어졌다고 한다. 헝가리에서 소비에트 정권이 무너지자 오스트리아 비엔나로 망명길에 올랐다가 1938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침공하자 다시 영국 런던으로 망명하였다. 영국에 머물면서 그는 생활고로 어려움에 부닥쳤지만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집필하였고 1951년 영어로 1954년 독일어로 출간하였다. 이후 하우져는 20세기 유럽을 대표하는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평가되었다. 영국 리드대학의 강단에서 강의하였고 교환교수로 미국에서도 강의하였다. 1978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사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1960년 "예술연구의 방법론", 1964년 "현대 예술과 문학의 근원", 1974년 "예술의 사회학, 1978년 "루카치와의 대화 " 등이 있다.

 

3. 오기스트 콩트(Auguste Comte)

오기스트 콩트는 실증주의적이고 경험주의적인 사회학의 창시자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실증주의 철학'과 '사회학'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다. 몽펠리에 있는 귀족의 가문에서 태어났고 프랑스 혁명 이후 파리의 이공과대학에서 진보적인 교육을 받았다. 셍시몽의 비서로서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의 발전을 위해 그와 같이 공동 연구했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관계에서 물러나 생계를 위해 수학 교사가 되었고, 1848년에는 실증주의협회를 만들었다. 그의 철학은 셍시몽의 사상의 실증주의적 측면을 정교화시켰다고 할 수 있는데, 당시 프랑스에서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했던 시기에 질서와 진보를 찾고자 했다. 그는 개인주의, 평등주의, 정치적 주권 주의와 같은 철학에 반대했는데, 이 철학들이 혁명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의 저서에는 당시의 과학, 혁명, 개혁에 반대하는 보수주의와 과학과 산업의 새로운 황금기임을 주장하는 급진주의 사이의 긴장이 나타나고 있었다. 오기스트 콩트는 공동가치의 체계로서 사회질서의 보수적 개념을 인정하고 있었다. 유럽의 전통적 가치와 종교적 가치의 쇠락이 사회적 위기를 창출하고 있다는 신념을 받아들이면서, 그는 실증주의를 통하여 사회개혁의 전제가 되며 합의를 재건하는 지적, 윤리적 개혁을 추구했다. 이러한 부분적 변화 때문에 실증주의가 사회의 객관적 개념으로부터 인류 주의, 개혁주의, 종교에 대한 주관적인 강조로 옮겨 간 급진적 변화라고 잘못된 해석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콩트의 실증주의를 '과학주의'와 동일시하는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다. 콩트의 실증주의는 단순한 경험주의로 되돌릴 수 없다. 콩트는 고전 경제학이 메마른 추상, 형이상학적 사고, 경제적 사실을 부당하게 고립시켰다고 주장하여 비판을 가한다. 콩트 주의 사고는 프랑스의 래비브뢸, 알렝, 뒤르켕과 모라, 영국의 밀, 스펜서, 레키, 몰리, 독일의 역사학자인 그로트와 몸잰, 그리고 남아메리카, 포르투갈, 스페인의 학문적 사상에 영향을 끼쳤다. 주요 저서로는 1822년 "사회 재조직을 위한 과학적 작업", 1830년~1842년 "실증 철학 6권", 1948년~1954년 "실증 정치의 체계 4권", 1844년 "실증 정신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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